성탄 전에 봐야 하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허진호 감독의 작품입니다. 제목에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죽음으로 스며드는 남자와 아무것도 모르고 기다리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남자의 태도처럼 차분하고 부드럽게 나아가요. 한국의 여름, 가을, 겨울을 따뜻하게 그렸습니다. 소소한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봐요. 너무 섬세해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울컥합니다. 잔잔한 선율이 더해져 감정을 키워요. 매우 추천합니다.
제목과 하루키
소설가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있어요. 요약하자면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를 크리스마스에 사려고 하면 없어서 8월에 미리 샀다'입니다.
영화 주인공 정원(한석규)과 다림(심은하)은 한여름에 만나요. 정원은 사진사입니다. 아버지가 운영했던 초원사진관을 이어받았어요. 다림은 주차 단속 공무원입니다. 매일 주차 위반 차량을 단속하고 사진을 찍어요.
다림은 매일 사진 인화를 해야 합니다. 하루는 급히 사진을 확대 출력할 일이 있어 초원사진관에 가게 됐어요. 장례식에 가야 해서 자리를 비웠던 정원이 때마침 도착합니다.
병 때문에 기력이 없는 정원은 조금 이따 다시 오라고 해요. 급한 다림은 다짜고짜 필름을 맡기고 밖에서 기다립니다. 몸을 추스른 정원은 일을 시작해요. 날도 더운데 땡볕에 서 있는 다림이 안쓰러워 아이스크림을 사서 건넵니다.
딱히 좋은 첫 만남은 아니었어요. 묵묵히 기다린 다림에게 고맙고 미안했던 정원, 떼쓰듯 떠맡겨 마음이 쓰였지만 아이스크림 선물에 마음이 녹은 다림. 두 사람은 사귐 없이 겨울을 맞이합니다. 8월에 연인이 됐다면 12월은 함께했을지도 모르죠. 다림은 하루키가 놓친 레코드 앨범처럼 정원을 떠나보냈습니다.
정원과 다림에게 수많은 망설임이 있었어요. 다림은 정원의 별자리가 사자자리라서 자기랑 잘 맞는다고 넌지시 말합니다. 일이 끝나면 사진관으로 오겠다고 신호도 보내요. 그리곤 나타나지 않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그렇게 됐어요. 곧 죽을 정원은 다림에게 힘껏 다가갈 수 없습니다. 다림을 기다리고 바람맞았지만 서운하다며 나무라지도 않아요.
둘은 서서히 가까워 갑니다. 같이 놀이공원 데이트도 하고 술잔도 기울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림은 은근슬쩍 팔짱을 낍니다. 정원은 놀랐지만 모르는 척 걸으며 하던 얘기를 마저 해요. 다림은 정원을 사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음 날 들뜬 마음을 안고 사진관으로 달려가요. 하지만 불은 꺼져 있습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문이 닫혀 있어요.
조용한 슬픔
정원은 아버지(신구)를 쏙 빼닮았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아버지도 정원처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에요. 나보다 먼저 갈 아들이 안쓰러워도 알은 채 안 하고 그림자처럼 곁에 머무릅니다. 밤 중에 아들이 아파 울어도 애처롭게 방문을 열기보다 넉넉히 흐느끼도록 시간을 줘요.
정원은 홀로 남을 아버지가 걱정입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려면 비디오 작동법을 알아야 해요. 몇 번을 설명해도 잘 따라 하지 못하자 불쑥 화가 납니다. 평소라면 기다렸을 텐데, 시간이 얼마 없어 조급해요. 텔레비전 리모컨뿐만 아니라 사진관에 들여온 최신 기계 사용법도 꼼꼼히 글로 적어 남깁니다.
허진호
허진호 감독 하면 사랑과 일상 두 단어가 떠올라요. 남자와 여자, 가족, 친구의 사랑을 구분해 그립니다. 숨은 뜻을 헤아리게 하고, 작은 표현으로 큰 울림을 줘요. 마치 대가의 손놀림처럼 군더더기 없습니다. 더하기보다 빼기로 감동을 선사해요. '봄날은 간다', '호우시절'에서도 같지만 다른 벅참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줄 평
12월은 늦었다는 걸 이제 알았어 5.0
넷플릭스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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